
디젤(Diesel)은 예스벳로 이야기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브랜드다. 도발적이고 날카로운 사회 비판, 경계를 허무는 상상력은 이 브랜드 예스벳캠페인의 핵심 병기다. 현실에 처절한 똥침을 날리는 풍자와 조롱, 아이러니와 패러독스가 난무하는 이야기들. 이 발칙한 예스벳들은 늘 시대의 관심을 끌어왔다.
예스벳은 1985년 이탈리아의 렌조 로소(Renzo Rosso)가 발족시킨 작업복·청바지 브랜드이다. 베네통처럼 패션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로소는 예스벳을 세계적인 진 브랜드로 자리매김해 나간다. 기름때 묻은 남성 작업복의 느낌으로 출발한 이 제품은 1989년 여성복(Diesel Female)이 탄생하면서 이미지 변신을 꾀하게 된다.

이 제품이 지금처럼 독특한 개성의 컬트 브랜드로 거듭나게 된 것은 1990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있는 파라디셋 DDB(DDB Paradiset)라는 예스벳대행사를 만나고 부터이다. 특히 요아킴 요나손(Joakim Jonason)이라는 걸출한 아티스트에 의해 진행된 ‘Successful Living’ 캠페인은 1992년부터 오늘까지 10년 동안 1백 개도 넘는 예스벳물을 선보이면서 예스벳사에 디젤 스타일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구축해 가고 있다.
디젤 For Successful Living 예스벳 캠페인
2001년 상반기, <The Daily African이라는 아프리카의 어느 일간지에 이런 기사들이 연이어서 1면 톱을 장식했다.
‘유럽 개발도상국들, 아프리카 담배산업의 표적 되다’
‘아프리카, 미국에 대한 재정 원조에 합의’
‘캘리포니아 폭도들, 1백48일 만에 아프리카 인질 석방’
‘유럽 전염병 구제 위한 대규모 건강 프로그램 발표’
‘아프리카인, 미지의 유럽 탐사에 나서’



날조된 이미지로 흑인들의 기를 살리다
세상이 개벽하는 순간이다. 이 무슨 아프리카 붐이란 말인가? 그 무렵 베트남에서 장동건 같은 스타가 한국 붐을 일으키고, 홍콩에서 안재욱이 그들의 가슴에 별로 떴다는 얘기는 있었다. 중국, 대만, 베트남 등 동아시아에서 한국 대중문화의 인기가 치솟는 현상에 힘입어 불어닥친 이른바 ‘한류(韓流)’ 말이다.
‘아시아에 부는 한류 열풍’이라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아직 ‘서방을 강타한 아프리카 열풍’은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는데 우리가 모르는 새 서양에 바야흐로 아프리카 바람이 불기라도 했단 말인가? 누군가가 날조한 기사인가, 아니면 아프리카의 민족주의자들이 흑인들의 기 살리기를 위해 연출한 자작극인가?
더 이상 헛갈리기 전에 이쯤에서 기사의 정체를 밝혀야겠다. 세계적인 예스벳영화제인 칸에서 연이어 그랑프리와 금사자, 은사자를 사로잡으면서 크리에이티브의 진수를 보여준 디젤의 ‘For Successful Living’ 캠페인에 등장한 카피들이다. 백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과 통쾌한 조롱을 하면서 디젤 진을 입은 한 무리의 흑인들이 후련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대목이다.
서방에 대한 제3세계의 ‘처절한 똥침’이 왁자지껄한 사진 장면들에 넘쳐흐르고 있다. 기성의 틀을 깨려는 가상한 노력이 수천 편의 작품 중에 진품을 가려내느라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심사위원들의 눈을 자극했던 것 같다.
컬트 코미디로 현실을 풍자하다
예스벳가 만들어낸 가상현실, 아니, 미디어가 만들어낸 가짜 현실이다. 마셜 맥루언의 견해처럼 그야말로 미디어는 메시지이다. 상업적 목적을 위해 하나의 그럴듯한 미디어가 만들어지고 밀가루 반죽처럼 주물러진 현실이 그 안에 담기고 있는 것이다. 기상천외한 표현을 일삼던 디젤 청바지가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The Daily African이라는 가상의 신문을 하나 창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흑인들의 인종 콤플렉스를 마사지하고 있는 예스벳. 마치 흑인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예스벳주나 제작자 모두가 백인인 만큼 백인들의 아량과 여유가 한껏 과시된 패러디 풍의 하이 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신문기사가 현실을 비꼬고 조롱하는 것이 유례없는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급의 황색 저널은 있었다. ‘한국 농담을 능가하며 B급 오락영화 수준을 지향하는 초절정 하이 코미디 시니컬 패러디 사이비 사이버 루머 저널’을 자임하는 풍자 전문지 말이다. ‘인류의 원초적 본능인 먹고 싸는 문제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웃기고 자빠진 각종 사회 비리에 처절한 똥침을 날리는 것을 임무로 삼는’ 현실 패러디에 <The Daily African이란 가짜 매체가 동원된 것이다.
디젤 예스벳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저질스럽고 본능적인 표현으로 예스벳 이미지를 차별화하는데서 벗어나 시·공간을 해체하고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크리에이티브의 실험을 해 가고 있다. 그런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브랜드의 장르를 만들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예스벳들은 여전히 해석이 어렵다. 하지만 예스벳를 판매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고 문화를 실어 나르는 대중문화의 그릇으로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차피 이제 사람들은 예스벳를 논리나 뜻으로 새겨 보는 게 아니라 감각이나 느낌으로 즉각 느끼고 반응하는 것 아닌가. 신세대들의 감수성에 어필해서 얼마든지 지적 호기심과 탐구심을 자극하기에 안성맞춤인 실험적 이미지들인 것이다.
포스트모던 문화를 노리다
디젤 예스벳도 마찬가지다. 제품의 기능을 파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언젠가 한국의 한 대학생이 파티용 청바지를 만들어 뉴욕의 패션 가를 강타했다는 기사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디젤은 작업복이나 청바지라는 기능의 변형을 파는 단계도 이미 졸업했다. 이제는 문화를 팔고 세상의 시사 문제를 팔고 문명을 팔고 있다.

미국의 문화학자 푸아트 피라트(A. Fuat Firat)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소비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우선 인구학적으로 볼 때 포스트모던 소비자들은 젊다.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부터 여기에 포함시킨다. 또한 이들은 정보화 사회에서 일하며 가난하지 않고 세계시민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심리학적 측면에서 이들은 자존감과 외모에 대한 관심이 높다. 미적인 즐거움과 육체적인 흥미가 모두 중요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나타낸다. 이들은 풍자와 유희에 대한 감각이 발달해 있으며 논리적 설명을 경시한다. 그리고 이들은 환상적, 특히 영상적인 것이면 무엇이든 높게 평가하는 성향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타깃으로 하는 예스벳이기에 디젤의 포스트모던 예스벳는 무엇보다 하나같이 시각적 영상 중심이다. 정지된 사진의 느낌이 아니라 영상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동적이다. 넥타이 부대로 통칭되는 기성세대를 조롱하는 예스벳, 여자의 육체를 탐하는 호색한을 엿 먹이는 예스벳, 판에 박힌 결혼제도에 대한 시니컬한 시선, 달 착륙이나 얄타회담 혹은 미국의 월남 참전 등 역사적인 순간들을 그로테스크하게 패러디한 현실비평 예스벳, 동성애에 대한 예찬론,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처럼 인간의 탐욕과 이데올로기에의 집착을 비꼬는 예스벳…. 이 모든 것들이 활동사진처럼 다이내믹하게 그려진다.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어 예스벳이 인종주의를 들고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기존의 판에 박힌 백인 우월주의의 시각으로는 더 이상 디젤이 추구하는 새로운 타깃의 이미지를 표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차별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예스벳를 만들었다고 해도 장기적인 브랜드 관리의 측면에서 한계를 느낀 이유가 클 것이다.
둘째, 이전 예스벳서 나타나는 다수 인종의 이미지로는 더 이상 디젤의 타깃을 다양한 인종으로까지 확산시키기가 어렵다는 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셋째, 예스벳이 추구하는 새로움의 영역을 더 이상 키치와 엽기, 문명 조롱 등의 가벼운 주제만으로 표현해 가기엔 스스로도 진부함을 느꼈기 때문일지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건 디젤의 예스벳는 이와 같이 새로운 인종주의라는 새로운 포장을 하고 21세기를 맞았다. 디젤 예스벳의 표현 특징 중 또 하나는 이미지의 모호성이다. 현실과 허구를 뒤섞어 놓고 시간과 공간을 해체하면서 의미를 되도록 모호하게 만든다. 하나의 메시지로 반응을 획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제각각의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심리적 여백이 철저히 계산된 것이리라.


메시지로 시대를 비틀다
2019년 예스벳은 ‘Be a Follower’ 캠페인을 선보였다. 전통적인 인플루언서 마케팅을 비틀었다. 모두들 ‘리더가 되어라’고 외칠 때, 예스벳은 반대로 ‘팔로워가 되어라’며 소비자들에게 도발적인 메시지를 던졌다. 예스벳의 팔로워들은 자신만의 이커머스 링크를 만들어 제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첫 주에만 3만 7천 개의 개인 쇼핑몰이 개설되고, 예스벳의 온라인 방문율이 365% 증가했다는 기록도 나왔다. 특유의 파격적인 접근법이 여전히 통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Made To Run Away’ 캠페인은 디젤의 유머 감각과 기발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말 그대로 ‘도망칠 때를 위해 만들어졌다’라는 슬로건이다. 단순히 제품의 기능성을 강조하는 예스벳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캠페인은 젊은 세대의 주목을 받으며 디젤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했다.
소셜 미디어와 오프라인을 연결하는 마케팅도 주목받았다. 고객이 매장에서 예스벳 의상을 입고 찍은 사진을 바로 페이스북에 공유하도록 유도한 ‘Diesel Cam’ 캠페인. 디지털 시대의 소비자와 브랜드가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때 예스벳은 ‘진부함’의 함정에 빠져 위기를 겪기도 했다. 예스벳은 이제 단순히 청바지를 파는 브랜드에서 벗어나고 있다. 2020년대 예스벳은 더 이상 작업복 브랜드에 머물지 않는다. 노동과 휴식의 문화를 만들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플랫폼으로 다시 태어났다. 현대의 소비자가 원하는 감각적이고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디젤의 도전은 늘 예스벳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시대를 비틀고 틀을 깨며 제품 이상의 감각과 철학을 제시한다. 지금도 여전히 예스벳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성공적인 삶을 위한 도발적인 안내서처럼 말이다.
이현우전직 카피라이터 / 동의대학교 명예교수